벌교의 주먹 유래
<태백산맥>의 무대 전남 벌교읍은 특이하게도 도시전체가 다리로 이어진 고장인데,
순천시 낙안읍성의 계곡으로부터 흘러 여자만으로 흐르는 벌교천과 벌교읍과 조성리의 경계에 있는 천치리의 존재산 계곡에서 장좌리를 거처 여자만으로 흐르는 원동천을 넘어야 비로소 벌교읍에 이를 수 있답니다.
그래서 벌교읍은 철 다리 두개를 포함해 모두 5개의 다리가 놓여져 있는 그야말로 다리 천국인 도시인데,5개의 다리를 면면히 살펴보면 애달픈 사연 하나쯤은 반드시 지니고 세월을 지탱하고 서있답니다.
벌교에서 남쪽 고흥으로 이어지는 원동천이 있는 선근다리는 홀어머니의 사랑을 위해 자식들이 놓았다는 징검다리의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며,또 광주에서 벌교로 들어오는 장좌리 앞 원동천의 철다리, 다시 벌교 역에서 순천으로 가는 벌교천의 철다리, 그리고 형제간에 총을 겨누던 소화다리, 벌교에서 낙안읍성으로 가는 홍교(횡개다리)가 바로 벌교읍과 전부 연결되어 있답니다.
이 다리들은 그저 끊어진 길을 연결하기 위해 놓았을 뿐이지만 그 다리들은 벌교에서 특별한 위치와 의미를 담고 있답니다. 특히 5개의 다리(橋) 중 소화다리는 반세기가 넘게 잊혀지지 않은 피비린내의 현장이었는데....
여.순 사건을 일으킨 14연대가 벌교를 장악했을 때 수많은 우익인사들이 부용교인 소화다리 위에서 죽어나갔으며반대로 14연대가 토벌군에 쫓겨 입산한 다음에는 우익들이 좌익을 처형한 곳이랍니다.
일제 강점 시대인 소화 6년(1931년)에 다리가 처음 놓아질 때만 해도 쇠 난간이 길게 놓여져 있었으나, 일제가 대동아 전쟁에서 연합군에 밀리며 대규모로 쇠를 공출해 갈 때 소화다리 난간도 함께 뜯겨 나갔으며...
그리고 여.순 사건이 일어났을 때까지도 그 난간이 복구되지 못했는데, 이것이 바로 처절한 비극을 부르게 된답니다.
난간이 없는 탓에 소화다리는 처형할 사람들을 줄줄이 세워놓고 방아쇠를 당기면 시체가 그대로 벌교천으로 떨어져,시야에서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시체 처리가 손쉬운 데다 학살의 당사자는 죄의식조차 느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살육현장으로 변해 갔답니다.
시체 위에 다시 시체가 쌓이고, 벌교천으로 밀물이 들어오면 물 위로 시체가 둥둥 떠다녔으며, 이러한 피비린내로 얼룩진 원혼들이 있었는지 해 년마다 소화다리 아래 벌교천에서는 익사사고가 발생했답니다.
어린이, 어른 할 것 없이 익사사고가 발생해 '죽음의 벌교천' 이라고 부르기도 했답니다.
또, 벌교에는 입으로 전해져 내려왔던 ‘벌교에서 주먹자랑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 말은 놀랍게도 항일운동과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1908년 안규홍으로 불리던 젊은 장사가 전남 보성군 벌교 장터에서 일본 헌병을 맨주먹으로 때려 죽인 사건이 일어나 일제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당시 벌교 지역이었던 낙안군을 없애 버리는 '폐군'이라는 극단적인 처방을 내린답니다.
일제는 낙안군을 없앤 뒤 벌교 지역을 분할, 지금의 순천과 보성으로 나누어 편입시켜 벌교에서 독자적인 행정이 이뤄질 수 없게 만들어 벌교에서 항일 의식을 뿌리뽑으려 했답니다.
하지만 항일의 저항 정신은 해방 후에도 벌교의 지역적 특성으로 남아 ‘벌교 주먹’의 전통으로 남았는데..
이 후 벌교 주먹은 사회적 약자를 괴롭히는 이들에 대한 ‘정의의 주먹’을 상징하게 됐으며
자유당 집권 시기 청년 정치 단체인 ‘무만동 청년회’, 멕시코 올림픽 권투 대표 선수를 지낸 박인성 등 수많은 ‘벌교 주먹’의 전설들이 출현하게 만든 원동력을 제공했답니다.